[기고] 중대재해처벌법과 건설현장, 그리고 1:29:300

2022.03.15

2022.3.14 / 전자신문 / 박원녕 대표 기고

angelswing

‘1:29:300.’ 암호같이 보이는 이 숫자는 산업재해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하인리히의 법칙’의 핵심이다. 한 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하는 데에는 29번의 작은 사고와 300번의 이상 징후가 동반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큰 재해 발생에는 예방할 수 있었던 기회가 반드시 존재하며, 사전에 파악한 징후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반복되는 산업현장 안전사고로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극약처방이 시행된 지 8주가 지났다. 법 적용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기업이 예방제도, 현장교육, 작업수칙 재정비 등에 공을 들였다. 특히 노동자 사망률이 타 산업 대비 3배 이상 높은 건설 산업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촉각을 더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이 무색하게 연초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사고부터 삼표 채석장 사고 등 중대재해가 어김없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사후 대응에 급급했던 기존 병폐를 방지하고 사고의 근본원인을 재정비하자는 의미에서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처벌 규모, 대상에만 주목할 뿐 그 뒤에 숨은 ’29번의 작은 사고와 300번의 이상 징후’의 의미가 간과되고 있다.

건설산업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재해는 돌발상황에서의 ‘불가항력적인’ 사고보다 사전에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던 ‘인재’ 비중이 높다. 안전불감증을 필두로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근본적 문제는 건설 현장의 낮은 생산성과 안전 관리에 대한 좁은 인식 등을 꼽을 수 있다.

건설 현장의 낮은 생산성은 고질적인 시간과 비용 문제에서 시작된다. 안전규정을 제대로 지키면서 일하면 작업 일정이 미뤄지고, 빠듯한 공기에 맞추다 보면 시간과 인력·비용이 더 소요된다. 결국 작업자·관리자·감독자 등 현장의 모든 관계자 간 충분한 계획과 소통 없이 일을 강행, 곧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화정 아이파크 붕괴사고도 공기 단축을 위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건물의 층을 올리면서 벌어진 전형적 인재다.

건설 산업에서 안전 관리를 바라보는 좁은 인식도 산업재해 예방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기존 안전 관련 솔루션은 계획을 통한 예방보다 실시간 관제 시스템이나 사후 기록 또는 문서화 용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장의 산업재해와 안전사고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전체 현장에 안전관리 습관이 내재화돼야 한다. 철저한 안전 계획이 선행돼야 하며, 모두가 쉽게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현장에 맞는 안전관리 체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관성적 계획과 일방적 지시로 이뤄지는 안전관리를 상황에 맞는 충분한 계획과 정확한 기록, 원활한 소통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워크로 전환해야 현장 안전관리가 수월해진다.

특히 말과 글로는 전달에 한계가 있는 작업 지시를 현장을 시각적으로 보여 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서 누구나 쉽게 현장 안전관리에 참여하는 방식이 새로운 안전관리 방법론으로 대두되고 있다. 드론 장비로 웹 상에 디지털 트윈을 구현하고, 다양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고, 작업 계획을 수립해 보고, 다양한 관계자와 소통하는 새로운 안전관리 방식은 안전불감증의 원인이었던 보여주기식 안전관리 계획을 대체할 ‘신개념 안전관리’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각종 기술 발전으로 현장의 안전한 작업을 지원하는 인프라는 지금까지 충분히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더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현장에서 안전관리를 바라보는 인식과 문화의 개선이 없다면 아무리 강력한 처벌을 내세워도 결코 안전사고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건설 산업의 영원한 과제인 생산성 개선 문제와도 연결된다. 안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낮은 생산성을 개선하기도 어려워진다.

결국 건설 산업이 낮은 생산성과 안전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의 모멘텀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안전관리에 대한 기업과 발주기관의 인식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법을 어떻게 피해 갈 것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할 것이 아니다. 1:29:300에서 1을 없애기 위해서는 29와 300이라는 원인에 대한 고찰과 해결이 우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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